하이든 생애와 음악 (목수의 아들, 에스테르하지, 런던, 마지막 순간)
중학교 음악실에서 처음 들었던 교향곡의 웅장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리는 마치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친구들이 한 교실에서 즐겁게 떠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에게 교향곡이 무엇인지 처음 알려준 작곡가가 바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이었습니다.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며 고전주의 음악의 기틀을 다진 인물입니다. 당시 저는 같은 반 친구가 학예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며 학교에 악기를 가져온 걸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릅니다.
목수의 아들에서 음악 천재로
하이든은 173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나무로 수레바퀴를 만들고 수리하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귀족 집안의 요리사였습니다. 음악 전문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가족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아버지는 하프를 연주할 줄 아는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어린 하이든이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부모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겨우 여섯 살이었던 아들을 친척인 요한 숙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숙부 요한은 함부르크에서 합창단 지휘자(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이자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카펠마이스터란 궁정이나 교회에서 음악 활동 전반을 책임지는 음악 감독을 뜻합니다. 하이든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옷이 항상 더러웠고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가까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음악 기초를 다질 수 있었고, 여덟 살 때는 오디션을 통과해 빈의 슈테판 성당 소년 합창단에 입단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유럽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 교육을 일찍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하이든의 소년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변성기가 찾아왔고, 황후는 그의 목소리가 까마귀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장난꾸러기 기질이 있어 다른 단원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등 말썽을 피웠고, 결국 합창단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좌절하지 않고 즉시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주자로 일하고, 음악을 가르치고, 거리에서 공연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학교에서 받은 음악 이론 교육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 이론서를 구해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꽃핀 30년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하이든은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 귀족들의 파트타임 일을 맡기 시작했고, 마침내 모르친 백작의 궁정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정식 채용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하이든은 결혼을 결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언니와 결혼했습니다. 모차르트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하니 당시엔 흔한 일이었을까요.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으며, 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했던 시대라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며 살았습니다.
1761년, 하이든이 스물아홉 살이었을 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모르친 백작이 재정난으로 음악 스태프를 해고하자 하이든은 즉시 부유한 에스테르하지 가문으로부터 새 일자리 제안을 받았습니다. 안톤 공작과 그의 후계자 니콜라우스 1세는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하이든에게 창작의 자유와 많은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하이든은 이곳에서 무려 30년간 일하며 교향곡, 오페라, 실내악을 작곡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삼촌에게 통기타를 선물받아 독학으로 익혔던 기억이 있는데, 교본을 보며 팅가팅가 연습하던 그 시간이 지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이든 역시 독학과 꾸준한 연습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의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때로는 외로웠습니다. 궁정이 빈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 모차르트 같은 친구들과 자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우스 공작이 바리톤(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현악기)을 배우고 싶어 하면 하이든은 그 악기를 위한 곡을 써야 했고, 오페라 감독까지 맡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사랑했습니다. 빈 대학교 음악학과에 따르면(출처: 빈 대학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시절 104개의 교향곡 중 대부분을 작곡했으며, 이는 교향곡 장르(Symphony)의 형식을 완성한 결정적 시기였습니다. 교향곡이란 여러 악기가 여러 악장에 걸쳐 연주하는 대규모 관현악곡을 뜻하며, 하이든은 이 형식을 체계화해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런던에서 맞이한 황금기
1790년 니콜라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안톤이 뒤를 이었습니다. 안톤은 음악보다 경제에 관심이 많아 대부분의 음악가를 해고했고, 하이든에게도 급여를 삭감한 채 남아달라고 제안했습니다. 30년간 충성했던 하이든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는 과감히 궁정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하이든은 이미 런던에서 유명 인사였습니다. 그의 악보가 런던에서 출판되고 공연되면서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1790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794년부터 1795년까지 두 차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긴 상태였지만,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회상했습니다. 한 음악 평론가는 "하이든이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지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중은 전율했으며, 이는 영국에서 기악 음악이 불러일으킨 그 어떤 감동보다 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시기에 하이든은 런던 교향곡(London Symphonies)이라 불리는 12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놀람 교향곡(Surprise Symphony)'은 지금도 널리 연주됩니다. 조용한 악장이 흐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모든 악기가 터지는 이 곡은 졸고 있던 청중을 깨우려는 하이든의 장난기가 담긴 작품입니다.
런던에는 하이든의 오케스트라를 질투하는 경쟁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이든의 옛 제자인 이그나츠 플레옐을 고용해 맞불을 놓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이런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플레옐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서로의 곡을 상대방 프로그램에 올려 연주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이든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궁정 악사들은 그를 '파파 하이든'이라 부르며 따랐고, 그는 언제나 유머와 관대함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제가 학예회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구를 보며 부러워했던 것처럼, 하이든도 어린 시절 자신보다 나은 환경의 음악가들을 보며 동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런던 여행 사이 빈에 머무는 동안 하이든은 돈을 벌어 집을 샀고, 베토벤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순 살의 하이든과 십대 후반의 베토벤은 때때로 충돌했습니다. 베토벤은 감정 기복이 심했고, 하이든을 훌륭한 작곡가로 인정하면서도 가끔은 형편없는 스승이라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를 끝까지 지원했습니다. 안톤 공작이 세상을 떠나고 니콜라우스 2세가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이끌게 되자 하이든은 다시 궁정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번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오라토리오(Oratorio) 장르의 대표작인 '천지창조(The Creation)'와 '사계(The Seasons)'를 완성했습니다. 오라토리오란 종교적 주제를 다룬 대규모 성악곡으로, 오페라와 달리 무대 장치 없이 연주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과 함께
하이든은 일흔한 살이 되자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다리가 붓고 어지럼증이 심했던 것으로 보아 동맥경화증(Atherosclerosis)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맥경화증이란 혈관 벽에 지방이 쌓여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평생 일만 해온 하이든에게 작곡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해야만 합니다. 음악적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며 쫓아옵니다. 벽처럼 제 앞을 가로막습니다. 빠른 악장이 떠오르면 맥박이 빨라지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느린 악장이 떠오르면 맥박이 느려집니다. 상상력이 저를 건반처럼 연주합니다. 저는 살아 있는 피아노입니다."
1808년, 하이든의 건강이 매우 나빴을 때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그를 위해 특별 공연한 것입니다. 하이든은 팔걸이 의자에 실려 공연장에 도착했고, 베토벤과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와 친구들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깊이 감동했지만 몸이 너무 약해 공연 절반만 보고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빈을 공격하며 하이든의 동네까지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떨리는 몸으로도 하이든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이든이 있는 곳에는 해가 미치지 않습니다." 그는 죽기 며칠 전 자신의 노래 '황제 찬가'를 힘차게 연주했고, 1809년 5월 31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 따르면(출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하이든의 죽음 이후 묘지에서 그의 머리가 도난당하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고, 머리는 1954년에야 몸과 재결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천재의 두개골을 연구하려는 골상학(Phrenology) 열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골상학이란 두개골의 모양으로 사람의 성격과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유사과학을 뜻합니다. 하이든의 성격은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증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유머 감각이 뛰어났고, 사람들에게 관대했으며, 부하 직원들을 잘 챙겼습니다. 에스테르하지 궁정의 음악가들이 그를 '파파'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하이든의 주요 업적 첫째, 교향곡 형식을 완성해 104곡의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 둘째, 현악 사중주 장르를 발전시켜 68곡을 작곡했습니다.
- 셋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로 종교 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 넷째, 베토벤을 비롯한 후배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이든의 삶을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예술가가 비극적 삶을 살았지만, 하이든은 안정적인 직장과 명예, 부를 모두 얻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난 것과 달리 하이든은 일흔일곱까지 장수하며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저는 중학교 음악실에서 처음 들었던 교향곡이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친구의 모습, 삼촌에게 받은 통기타로 혼자 연습하던 시간, 그 모든 순간이 하이든의 음악처럼 제 안에 살아 숨 쉽니다. 하이든은 천재였지만 동시에 꾸준히 노력한 사람이었고, 그 노력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저는 다시 한번 꾸준함의 힘을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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