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일대기 (본, 하이든, 청각장애, 교향곡)
음악 시간에 졸던 친구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곡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그게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었습니다. 그 임팩트 있는 시작부터 압도적인 하이라이트까지, 교실 전체가 깨어나는 순간이었죠. 베토벤은 우리나라에서 '하희돈의 제자'로도 불렸던 인물인데요. 하희돈이 누구냐고요? 바로 하이든을 한자로 음역한 이름입니다. 해방 직후까지 이렇게 불렸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본(Bonn)에서 시작된 음악 인생, 그리고 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평범한 서민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고귀한 혈통도 아니었고, 그저 음악을 업으로 삼는 평범한 집안이었죠. 베토벤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평생 이 동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첫 음악 선생님은 아버지 요한(Johann)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이 베토벤을 너무 가혹하게 가르쳐서 항상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확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자신의 천재 자녀들, 난네를(Nannerl)과 볼프강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 투어를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심지어 베토벤이 7살일 때 첫 공연 포스터에 나이를 6살로 속여 적기까지 했죠. 7살이면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16살 무렵 베토벤은 비엔나로 가서 모차르트를 만나려 했습니다. 실제로 만났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릅니다. 역사는 이런 중요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비엔나에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는 더욱 무능해졌습니다. 베토벤은 10대 후반을 동생들을 먹여 살리며 보냈습니다. 그는 정말 책임감 강한 형이었던 거죠.
하이든과의 만남, 비엔나 정착기
1790년 크리스마스 무렵, 고전주의 음악의 거장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이 비엔나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에 본을 거쳐 갔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나 베토벤만큼 유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베토벤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2년 뒤 런던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을 들렀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베토벤에게 제안했습니다. "비엔나로 와서 내 제자가 되지 않겠나?" 베토벤은 주저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1792년 베토벤이 비엔나에 도착했을 때 두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첫째,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 둘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 모차르트의 죽음은 당시 음악계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때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Count Ferdinand von Waldstein)이 베토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참 인상적입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대는 하이든의 손을 거쳐 모차르트의 영혼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베토벤 본인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큰 기대를 심어줬습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정신적 계승자로 여겨지기 시작했죠.
흥미롭게도 베토벤은 초기에 작곡보다는 피아노 연주와 음악 이론 공부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기 전에 먼저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1794년 하이든이 다시 런던 투어를 떠났을 때, 베토벤은 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비엔나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후원자들을 찾아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비엔나에 정착했죠. 당시 예술가들은 귀족 후원자 없이는 활동하기 어려웠거든요.
하이든과 베토벤의 관계는 복잡했습니다. 베토벤이 첫 작품(Opus 1)을 출판하려 할 때, 하이든은 "표지에 '하이든의 제자'라고 써라. 그럼 더 잘 팔릴 것이다"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는 제 이름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런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809년 하이든의 76번째 생일 파티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으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인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 간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서로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관계였던 거죠.
청각 장애와 싸운 작곡가의 삶
베토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청각 장애입니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중증 이명(tinnitus)으로 추정되는데, 이명이란 실제 소리가 없는데도 귀에서 계속 소음이 들리는 증상을 말합니다. 음악가에게 이보다 더 잔인한 병이 또 있을까요?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전문적으로는 연주가 어려워졌고, 개인적으로는 대화를 피하게 됐다고 했죠. 사회적으로도 고립되는 느낌을 받았던 겁니다. 의사는 베토벤에게 몇 달간 휴식을 취하며 상황을 정리하라고 권했습니다.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동생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에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지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예술을 사랑한다. 그래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1811년 베토벤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concerto)을 연주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협주곡이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대규모 작품을 뜻하는데, 그는 자신의 곡조차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던 거죠. 그 이후로 그는 공개 연주를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1824년, 그는 자신의 마지막 대작인 교향곡 9번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은 기립 박수를 보냈지만, 베토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돌려 관객석을 보게 해줘야 했죠.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Carl Czerny)는 1815년 무렵 베토벤이 거의 완전히 청각을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출처: 베토벤하우스 본). 그 이후 베토벤은 대화책(conversation book)이라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친구들이 하고 싶은 말을 책에 적으면 베토벤이 그걸 읽고 말로 답하거나 글로 답하는 방식이었죠. 이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베토벤은 고립되지 않고 계속 창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향곡의 길을 연 작곡가, 그리고 죽음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돌아온 베토벤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 체르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든 음악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제 새로운 길을 가겠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혁신적인 작품들을 쏟아냈습니다. 교향곡 3번 '영웅(Eroica)', 교향곡 5번 '운명', 그리고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들. 이 시기의 작품들이 베토벤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의 삶은 정말 롤러코스터 같았습니다. 40대 초반에는 몇 년간 심각한 병을 앓으면서도 죽지 않고 버텼고, 결핵에 걸린 동생을 간호하며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외모 관리도 포기했고, 공공장소에서 이상하게 행동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걸작들을 계속 만들어냈습니다. 이 모순적인 모습이 베토벤이라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향곡 9번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이자 그가 마지막으로 공개 무대에 선 작품입니다. 체르니는 이 곡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며, 젊은 정신이 느껴진다. 그의 독창적인 머릿속에서 나온 힘과 혁신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비록 가끔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머리를 흔들게 만들지만 말이다." 저는 이 말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끝까지 도전하고 혁신했던 사람이니까요.
베토벤은 1825년부터 본격적으로 건강이 악화됐지만, 그럼에도 죽지 않았습니다. 1826년에도 심하게 아팠지만 또 버텼습니다. 그는 정말 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1827년,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뇌우가 몰아치는 날 큰 천둥소리와 함께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토벤다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장례식에는 약 2만 명의 비엔나 시민들이 참석했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날 슈베르트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나중에 베토벤 옆에 묻혔습니다.
베토벤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습니다. 납 중독설도 있고, 간 손상으로 인한 합병증설도 있습니다(출처: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납은 당시 의사가 처방한 약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었고, 간 손상은 알코올 때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가 평생 병마와 싸우면서도 놀라운 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베토벤은 음악 교사였던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음악 선생님은 베토벤을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노력형 음악가'라고 소개하셨죠. 하지만 저는 베토벤의 음악을 깊이 경험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베토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명백한 천재였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배운 지 6개월 만에 베토벤 소나타 16번을 입시곡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정말 버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베토벤은 범인이 노력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베토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겁니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라니, 이보다 더 가혹한 운명이 있을까요? 하지만 베토벤은 피아노에 귀를 바짝 대고 진동으로 음을 파악하며 끝까지 곡을 썼습니다. 저는 이런 베토벤의 모습에서 진정한 예술가 정신을 봅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친구들과 제자들이 있었기에 그가 고립되지 않고 창작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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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ethovenplatz vienn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