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 바이로이트 축제, 코지마
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음악을 전공했지만 생계 문제 때문에 결국 작곡을 포기했습니다. 교수님 연구를 돕거나 출판사 음악교과서 작업을 하며 버텼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인 수입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작곡가는 제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천재적인 음악성은 인정받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까지 겹치며 유럽 전역을 도망 다녔던 인물입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도망친 빚더미 인생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티푸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시인인 루트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했습니다. 바그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연극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경제적으로는 늘 불안정했습니다.
20대 초반 뷔르츠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에서 합창단 지휘자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법원 소환장이 문에 붙어 있어서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을 피해 다니는 삶이 일상이었던 겁니다.
1839년에는 리가에서 쌓인 빚 때문에 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 미나(Minna)와 함께 배를 타고 파리로 향했는데, 이 과정에서 겪은 폭풍우 경험이 나중에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바그너는 경제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고, 결국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리엔치(Rienzi)' 초연으로 첫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품 속에 남겨진 불륜 스캔들
바그너는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저는 음악가로서 그의 예술성은 존경하지만, 개인적인 삶만큼은 절대 닮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후원자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일은 정말 부도덕한 행동이었습니다.
1850년대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한 바그너는 독일 사업가 베젠동크(Otto Wesendonck) 부부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그너는 후원자의 아내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불륜 관계는 당시 41세였던 바그너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입니다.
![]() |
| 요제프 알베르트(Joseph Albert)가 촬영한 트리스탄 역의 루트비히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와 이졸데 역의 말비나 가리그 부부의 초연 당시 모습 |
오페라 속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왕 마르케(King Marke) 때문에 지상에서 함께할 수 없는 연인입니다. 이는 바그너 자신과 마틸데의 상황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습니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의 별장 옆 작은 집(일명 '아실룸')에서 이 작품을 작곡했는데, 마틸데와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결국 취리히를 떠나야 했습니다.
- 바그너는 생애 동안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유부녀였습니다.
- 취리히 시절 하녀였던 브레넬리 바이트만(Vreneli Weidmann)과의 사이에서도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말년에는 '파르지팔(Parsifal)' 초연 당시 꽃의 소녀 역할을 맡은 카리 프링글(Carrie Pringle)과도 염문을 뿌렸습니다.
이런 행동들은 아내 코지마(Cosima)조차 묵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반복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바그너의 사생활을 보며,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인간적으로는 존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로이트 축제의 탄생
1864년, 바그너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준비했지만 77회의 리허설 끝에 "연주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 여장을 하고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Ludwig II)였습니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음악에 푹 빠진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왕은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청해 경제적으로 전폭 지원했고, 1865년 뮌헨 국립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유럽 음악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바그너는 일약 스타 작곡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요구는 바이에른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고, 결국 1년 만에 뮌헨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계속 후원했고, 바그너는 자신만의 축제극장(Festspielhaus)을 짓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곳이 바로 바이로이트(Bayreuth)입니다.
바그너는 1872년 바이로이트로 이주해 축제극장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은 1876년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전곡 초연으로 막을 올렸고, 유럽 전역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였습니다. 이 축제는 바그너 음악의 성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출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공식 사이트).
코지마와의 결혼, 그리고 말년의 방종
바그너의 두 번째 아내는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자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의 전 부인이었던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입니다. 코지마는 뷜로와 결혼한 상태에서 바그너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두 아이를 낳은 뒤에야 정식으로 이혼하고 바그너와 재혼했습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엄격한 관리자였습니다. 바그너가 1883년 베니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이끌며 바그너의 유산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했고, 이는 후에 나치 정권과 바이로이트가 결탁하는 불행한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바그너는 말년까지도 여성 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베니스에서 카리 프링글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려 하자, 참다못한 코지마와 격렬한 부부싸움을 벌였고, 그 직후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저는 이런 바그너의 말로를 보며,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해도 인간적 품성이 부족하면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바그너의 음악은 분명 천재적입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혁신적인 화성, '니벨룽의 반지'의 웅장한 서사는 지금도 전 세계 오페라 무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삶 자체는 전혀 닮고 싶지 않습니다. 빚더미에 쪼들리고, 친구와 후원자를 배신하고, 불륜을 일삼은 삶은 아무리 예술적 성취가 크다 해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평범하게, 여유롭게, 평온하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고 느낍니다. 경제적 자유를 확보해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는 날을 꿈꾸지만, 바그너처럼 살지는 않을 겁니다.
--- 참고: https://youtu.be/JPdz8Oa9Doo?si=s9FvoybuYmt7g7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