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퍼셀 (디도의 탄식, 바로크 음악, 영국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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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합창단 연습 중에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복도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음악이 바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659년 런던에서 태어나 36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는 영국 바로크 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디도의 탄식 헨리 퍼셀의 《Dido and Aeneas》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왜 사람들이 이 작곡가를 300년 넘게 기억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디도의 탄식(Dido's Lament)'이라는 아리아(aria)는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리아란 오페라나 칸타타에서 독창자가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를 뜻하는데, 이 곡은 화려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청자의 마음 깊숙이 파고듭니다. 1689년 첼시의 한 여학교를 위해 작곡된 이 작품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비극적 사랑을 다룹니다( 출처: Britannica ). 퍼셀은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아리아를 절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레치타티보란 오페라에서 대사를 전달하듯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부분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극적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잃지 않았습니다. 제가 합창 연습 중 갑자기 눈물을 쏟았던 것처럼, 퍼셀의 음악은 준비되지 않은 감정까지 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발달한 오페라 전통이 없었습니다. 퍼셀은 이 공백을 메우려 노력했고, 영국만의 정서를 음악에 담아냈습니다. 그의 화성(harmony) 처리 방식은 여러 음이 동시에 울려 만들어내는 소리의 조화를 극대화했고, 대위법(counterpoint)을 통해 서로 다른 선율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놀라운 표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퍼셀 음악의 특징입니다. ...

몬테베르디 (오페라 탄생, 감정 표현, 르네상스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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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베르디는 요즘 사람들이 아는 인물로 말하자면 대니 구 같은 인물이 떠오릅니다. 대니 구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작곡도 하고 본인이 작곡한 곡을 노래하는 싱어 송라이터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마칭밴드에서 트럼펫을 불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경연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여러 음악 장르를 넘나드며 그의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다재다능한 음악가가 16세기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몬테베르디. 그런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음악이 단순히 신을 찬양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16세기 말,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이 작곡가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며 음악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오페라 탄생 몬테베르디는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크레모나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크레모나는 수제 바이올린 장인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습니다. 1590년, 그는 만토바 공국의 궁정 바이올리니스트 겸 성악가로 취업하게 됩니다. 만토바 공국을 다스리던 곤차가 가문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권력 가문이었고, 궁정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1600년, 몬테베르디는 피렌체로 가서 특별한 공연을 보게 됩니다. 카메라타라는 인문학 연구 그룹이 만든 '유리디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카메라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연구하며 음악과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1597년에 만든 '다프네'가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지만, 악보가 모두 사라져 현재는 공연할 수 없습니다. 몬테베르디는 '유리디체'를 보면서 "이 정도면 저도 작곡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607년, 만토바 공국의 궁정 결혼식 연회에서 몬테베르디는 자신의 첫 오페라 '오르페오'를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공연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입니다. 저는 요즘...

비발디 사계 뒤에 감춰진 비밀 (사제, 협주곡, 역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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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하면 '사계'만 떠오르시나요? 스키장 이름으로만 알고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안토니오 비발디는 500곡이 넘는 협주곡을 남긴 바로크 시대의 거장입니다. 저 역시 학창시절 음악 시험에서 사계를 듣고 악장마다 주제가 다르다는 걸 배웠을 때, 음악에도 글쓰기처럼 '주제'가 있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집에 라디오와 TV밖에 없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경험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제 첫 관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제였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예술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일곱 개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었고, 산 마르코 대성당 같은 곳에서는 화려한 종교 음악이 연주되었습니다. 비발디의 아버지는 실력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린 안토니오는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우며 12세에 이미 아버지와 함께 연주회에 설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비발디는 25세에 사제 서품(聖職授任)을 받았습니다. 사제 서품이란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로 임명되는 의식을 말합니다. 붉은 머리 때문에 '붉은 사제(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비발디는, 그러나 사제 업무보다는 음악에 더 몰두했습니다. 1737년 그가 쓴 편지에 따르면, 천식과 같은 심각한 건강 문제로 인해 미사를 집전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핑계 삼아 진짜 하고 싶었던 음악에 전념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비발디는 피에타 자선원(Ospedale della Pietà)에서 약 30년간 바이올린 교사이자 작곡가로 일했습니다. 피에타는 고아 소녀들을 돌보는 시설이었는데, 이곳에서 음악 교육이 이루어졌고 여성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프랑스 학자 샤를 드 브로스는 1739년 편지에서 "피에타의 소녀들은 천사처럼 노래하고 바이올린, 플루트, 오르간, 첼로 등을 뛰어난...

헨델 메시아 더블린 공연, 할렐루야 코러스, 카스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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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작은 공연장 닐스 뮤직 홀에는 평소보다 두 배 가까운 관객이 들어찼습니다. 신문 광고에는 "여성분들은 후프스커트를 입지 말고, 신사분들은 칼을 두고 오시길"이라는 요청이 실렸죠. 좌석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날 초연된 작품이 바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였고, 저는 이 곡을 음악 시간에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장대함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더블린 공연, 메시아 초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1741년 여름, 친구이자 대본가인 찰스 제닝스가 보낸 성경 구절 편집본을 받고 불과 24일 만에 메시아 전곡을 완성했습니다. 8월 22일 작곡을 시작해 9월 14일 완성했으니, 3시간이 넘는 대작을 악보에 옮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속도였죠. 하지만 헨델은 이 작품을 런던이 아닌 더블린에서 초연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런던의 오페라 시장은 헨델에게 냉담했습니다( 출처: 영국 왕립예술원 ). 귀족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에만 열광했고, 헨델이 고용한 두 명의 프리마돈나 파우스티나 보르도니와 프란체스카 쿠초니는 무대 위에서 주먹다짐을 벌이는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왕세자비가 관람 중이던 극장에서 두 소프라노가 싸우고, 관객들까지 편을 갈라 난투극을 벌인 사건은 '라이벌 퀸 스캔들'로 불리며 헨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줬죠. 제가 이 일화를 처음 알았을 때는 솔직히 현대 연예계 팬덤 싸움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더블린은 달랐습니다. 아일랜드 수도는 당시 영국령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립적인 분위기를 유지했고, 헨델의 음악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헨델이 더블린에서 연 모든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고, 현지 언론은 그를 극찬했습니다. 런던의 유행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관객들이 오히려 예술의 진가를 알아본 셈입니다. 할렐루야 코러스와 기립 관습의 탄생 메시아...

하이든 생애와 음악 (목수의 아들, 에스테르하지, 런던,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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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음악실에서 처음 들었던 교향곡의 웅장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리는 마치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친구들이 한 교실에서 즐겁게 떠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에게 교향곡이 무엇인지 처음 알려준 작곡가가 바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이었습니다.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며 고전주의 음악의 기틀을 다진 인물입니다. 당시 저는 같은 반 친구가 학예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며 학교에 악기를 가져온 걸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릅니다. 목수의 아들에서 음악 천재로 하이든은 173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나무로 수레바퀴를 만들고 수리하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귀족 집안의 요리사였습니다. 음악 전문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가족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아버지는 하프를 연주할 줄 아는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어린 하이든이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부모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겨우 여섯 살이었던 아들을 친척인 요한 숙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숙부 요한은 함부르크에서 합창단 지휘자(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이자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카펠마이스터란 궁정이나 교회에서 음악 활동 전반을 책임지는 음악 감독을 뜻합니다. 하이든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옷이 항상 더러웠고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가까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음악 기초를 다질 수 있었고, 여덟 살 때는 오디션을 통과해 빈의 슈테판 성당 소년 합창단에 입단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유럽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 교육을 일찍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하이든의 소년 시절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변성기가 찾아왔고, 황후는 그의 목소리가 까마귀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장난꾸러기 기질이 있어 다른 단원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등 말썽을 피웠고, 결국 합창단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