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음악세계 (인상주의, 화성파괴, 자연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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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태어나 5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 반세기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20세기 음악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습니다. 전통 화성 규칙을 무시하고 평행 5도와 8도를 과감하게 사용했으며, 전음계(Whole Tone Scale)라는 독특한 음계로 꿈결 같은 음향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위클리 리사이틀에서 처음 그의 월광을 들었는데, 입시 준비하며 접했던 딱딱하고 규칙적인 음악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황홀할 정도로 몽환적이고 자유로운 그 음악에 단번에 빠져버렸습니다. 인상주의라는 오해와 드뷔시의 실제 정체성 드뷔시 하면 흔히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용어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원래 미술 용어인데, 비평가들이 드뷔시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붙인 편의적 분류에 불과했습니다. 드뷔시는 자신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멍청이'로 여겼고, 스스로를 단지 '프랑스 음악가'라고 불렀습니다( 출처: Music Theory Academy ). 그가 정말 공감했던 예술 사조는 상징주의(Symbolism)였습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주창한 상징주의는 단어의 의미보다 소리 자체를 중시하는 흐름이었습니다. 드뷔시는 이를 음악에 적용해 화성 규칙과 성부 진행(Voice Leading) 원칙을 무시하고 순수한 음향 효과만을 추구했습니다. 성부 진행이란 여러 성부가 동시에 움직일 때 각 성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작곡 기법인데, 드뷔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평행 화음만 쌓아 올렸습니다. 당시 파리 음악원 교수들은 이런 그의 스타일을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으며 절망적으로 무관심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도 대학 4년 내내 규칙 잘 지켜진 화성학을 공부했기에 드뷔시의 음악은 제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모양새가 있었고, 당시 음악적 기준...

라벨의 완벽한 음악세계, 오케스트레이션, 단순함의 역설, 의도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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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의 음악을 처음 제대로 의식하며 들었던 건 대학 시절 오케스트레이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라벨의 작품을 예로 들며 설명해 주셨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볼레로였습니다. 같은 리듬이 계속 반복되고 멜로디도 크게 변하지 않는데 곡이 점점 커지며 긴장감이 쌓여 가더군요. 음악적으로 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인데 이상하게도 계속 귀를 붙잡아 두는 힘이 있었습니다. 완벽주의자 라벨의 음악 세계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1875년 프랑스 남부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2살에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신동으로 불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타고난 귀를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죠. 1889년 파리 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에 입학한 라벨은 학교 생활에 그리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음악원이란 프랑스의 국립 음악 교육 기관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라벨은 엄격한 학업 환경보다는 자신만의 속도로 배우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의 음악적 사고와 표현은 점점 현대적으로 변해갔고 이는 극도로 보수적인 교수진과 충돌했습니다. 결국 그는 1895년 퇴학당했고 1897년 다시 입학했지만 2000년에 또다시 퇴학당했습니다. 라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흔히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Impressionism) 음악가로 분류되는데, 인상주의란 명확한 형식보다는 분위기와 색채를 중시하는 음악 경향을 뜻합니다. 드뷔시는 이 용어를 자신의 음악에 적용하는 것을 싫어했고 라벨 역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곡을 공부하며 항상 화성 진행이나 형식 구조를 먼저 고민하던 저에게 라벨의 음악은 조금 다른 방향처럼 느껴졌습니다. 라벨은 느린 작업 속도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엄격한 자기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머릿속에서 곡 전체를 완성한 뒤 세세한 부분까지 다듬고 나서야 악보에 한 번에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 이런 ...

차이콥스키의 후원자, 작품 수정, 예술가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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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술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까 하는 의문입니다. 차이콥스키의 일생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곡가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저 역시 한때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나데즈다 폰 메크라는 후원자 차이콥스키에게는 다행히 나데즈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라는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유한 미망인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차이콥스키를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며 13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출처: Biography.com ). 심지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이런 관계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후원자와 예술가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지키면서도 음악적 교감을 나눴다는 점입니다. 후원(patronage)이란 예술가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귀족이나 부유층의 후원에 의존해 창작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차이콥스키 역시 나데즈다의 후원 덕분에 여행하고 투어를 다니며 오로지 작곡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예술가에게 경제적 안정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1890년 나데즈다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 지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두 사람의 서신도 끊겼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돈을 잃은 것보다 그녀와의 우정을 잃은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술가에게 후원자는 단순히 돈을 대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바그너의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 바이로이트 축제, 코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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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음악을 전공했지만 생계 문제 때문에 결국 작곡을 포기했습니다. 교수님 연구를 돕거나 출판사 음악교과서 작업을 하며 버텼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인 수입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작곡가는 제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천재적인 음악성은 인정받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까지 겹치며 유럽 전역을 도망 다녔던 인물입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도망친 빚더미 인생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티푸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시인인 루트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했습니다. 바그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연극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경제적으로는 늘 불안정했습니다. 20대 초반 뷔르츠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에서 합창단 지휘자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법원 소환장이 문에 붙어 있어서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을 피해 다니는 삶이 일상이었던 겁니다. 1839년에는 리가에서 쌓인 빚 때문에 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 미나(Minna)와 함께 배를 타고 파리로 향했는데, 이 과정에서 겪은 폭풍우 경험이 나중에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바그너는 경제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고, 결국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리엔치(Rienzi)' 초연으로 첫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품 속에 남겨진 불륜 스캔들 바그너는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저는 음악가로서 그의 예술성은 존경하지만, 개인적인 삶만큼은 절대 닮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후원자의 아내와...

브람스의 완벽주의, 교향곡 1번, 인간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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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을 하다 보면 첫 모티브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없이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2~3마디의 짧은 악구라고 해서 쉬울 거라 생각하지만, 곡 전체의 출발점이 되는 만큼 부담감이 상당합니다. 저도 대학 시절 오선지 위에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브람스는 이런 완벽주의 성향이 훨씬 더 극단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악보를 그냥 태워버리고, 교향곡 1번을 완성하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렸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창작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완벽주의 성향과 창작 태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베토벤, 바그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창작 과정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극도로 신중하고 느렸습니다. 브람스는 대위법(Counterpoint)이라는 기법에 능숙했는데, 이는 여러 개의 선율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도 화성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작곡하는 고난도 기술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의 멜로디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엮어야 하므로, 작곡 난이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요하네스 브람스 : 젊은 시절의 브람스, 수더분해 보이는 수염긴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꼬장꼬장한 젊은 날의 브람스 초상화를 가져와 봤다.. 저도 작곡을 할 때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다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님께서 "좋은 작품은 한 곡에 매달려 나오는 게 아니라 다작을 하며 경험을 쌓아야 그중에서 명곡이 탄생한다"고 조언하셨지만, 저는 여전히 마음에 드는 모티브 하나가 나올 때까지 오선지를 붙들고 있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브람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고나 스케치 대부분을 직접 없애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악보는 아예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창작 속도를 극도로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