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입문 추천 10곡, 처음 듣는 사람도 빠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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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어디서부터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했을 때는 그랬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듣고 있어도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었다. 지금은 음악을 공부했고 작곡까지 했던 사람이지만, 그 시작은 아주 평범했다. 누군가가 “이건 한번 들어봐”라고 건네준 한 곡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은 결국 ‘어떤 곡을 처음 듣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어렵고 난해한 곡을 들으면 금방 지치게 된다. 반대로 멜로디가 익숙하고 감정이 바로 전달되는 곡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클래식 음악은 전혀 다른 세계로 느껴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곡들을 중심으로, 내가 직접 듣고 느꼈던 경험을 바탕으로 추천해보려고 한다. 교향악단의 현악 섹션 클래식 음악을 처음 들을 때 중요한 기준 처음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 멜로디가 귀에 잘 들어오는가 • 감정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가 • 너무 길지 않은가 이 기준을 충족하는 곡들은 대부분 낭만주의 이후의 작품들이다. 그래서 입문자에게는 바흐보다 쇼팽이나 차이콥스키가 더 쉽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학창 시절에는 이론적으로는 바흐를 공부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에 더 끌렸던 기억이 있다. 클래식 음악 입문 추천 10곡 1. 베토벤 – 엘리제를 위하여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멜로디다. 짧고 단순하지만 감정이 분명하게 전달된다. 2. 모차르트 –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거부감을 낮춰준다. 3. 쇼팽 – 녹턴 Op.9 No.2 피아노가 노래하는 듯한 곡. 밤에 들으면 더 깊게 와닿는다. 4. 드뷔시 – 달빛 (Clair de Lune) 내가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던 곡이다. 음악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

바로크 고전 낭만 근대 작곡가 20인이 우리에게 남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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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듯 퍼져 나가고 있는 요즘, 현대에 와서는 클래식 음악이 많이 소외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은 전자기기로 이루어진 악기들, 앰프를 통해 증폭된 기타와 베이스, 드럼, 신디사이저 같은 악기들로 만들어진 음악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듣기보다 SNS와 온라인에서 AI가 만들어낸 배경음악이 깔린 짧은 영상들을 보며 음악을 소비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런 시대 속에서 오랜 세월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긴 음악을 듣는 일은 마치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평생을 바쳐 곡을 쓴 작곡가들, 그리고 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인고의 세월로 버텨온 연주자들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악상을 떠올리는 고뇌의 시간 반대로 TV나 온라인에서 쉽게 접하는 음악들, 혹은 AI가 뚝딱 만들어낸 음악들은 내게 초가공식품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초가공식품을 계속 먹다 보면 어느 순간 유기농 음식이 그리워지듯, 요즘처럼 빠르게 소비되는 음악들 사이에서 클래식 음악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감을 놓치지 않고 악보에 옮기는 작곡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바로크 시대 이후 20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20명의 위대한 작곡가를 통해 음악의 흐름을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그들의 음악과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부모 세대가 즐겨 들었을 법한 음악들이기도 하다. 관현악곡이 연주되는 대공연장 물론 클래식 음악이 귀족층의 문화에서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지금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클래식 음악이 젊은 세대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그런 사회적 배경 때문이라기보다...

스트라빈스키의 혁명 봄의제전, 신고전주의, 12음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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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의 '봄의제전' 초연 당시 파리 극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불협화음과 예측 불가능한 리듬에 분노했고, 공연은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저는 작곡을 배우면서 이 일화를 듣고 늘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길래 사람들을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왜 스트라빈스키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을까요. 봄의제전과 음악적 원시주의 스트라빈스키가 1913년 발표한 '봄의제전'은 음악적 원시주의(Musical Primitivism)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음악적 원시주의란 전통적인 조성 체계를 벗어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를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수천 년 전 원시 시대의 제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거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피나 바우쉬가 안무한 대표작 '봄의 제전' 이 작품에서 스트라빈스키는 E장조와 E플랫장조 7화음을 동시에 울리는 폴리토날(Polytonal)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폴리토날이란 두 개 이상의 조성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당시로서는 극도로 불협화음적으로 들렸습니다. 저도 처음 이 부분을 들었을 때 귀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두 개의 다른 곡이 동시에 연주되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리듬 역시 혁명적이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예측 불가능한 박자와 강세를 배치해 청중이 박자를 셀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서양 클래식 음악은 규칙적인 박자 구조를 따르는데, 봄의제전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제가 작곡 수업에서 이런 불규칙한 리듬을 시도했을 때 교수님께서는 "청중이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고 조언하셨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오히려 그 혼란을 의도했던 것 같습니다( 출처: MoMA ). 신고전주의 시기의 재해석 1920년대 들어 스트라빈스키는 돌연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는 18세기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 형식을 차용한 신고전주의(N...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1번, 우울증, 완벽한 재기,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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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은 1897년 초연 당시 완전한 실패작으로 낙인찍혔습니다. 한 음악 평론가는 "지옥에 있는 음악원 수감자들이나 좋아할 곡"이라는 혹평을 쏟아냈고, 지휘자마저 술에 취한 상태로 연주를 망쳤습니다. 저 역시 제 작품이 처음 공개될 때마다 느끼는 그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압니다. 창작자에게 평가는 언제나 칼날 같은 순간이니까요. 교향곡 1번 초연, 그리고 추락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부유하고 음악적인 가족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최고 점수로 졸업했고, 차이콥스키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을 만큼 촉망받는 신예였습니다. 하지만 1897년, 그의 인생은 교향곡 1번 초연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초연 당시 지휘자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술에 취한 채 지휘봉을 잡았고, 오케스트라는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훗날 "외부의 비난보다 내 교향곡이 나 자신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도 학창 시절 작곡한 곡이 동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을 때, 그 무너지는 기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남의 평가보다 내 귀가 먼저 실망하는 그 순간 말이죠. 이 사건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심각한 우울증(Depression)에 빠졌습니다. 우울증이란 단순한 기분 저하를 넘어 일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창작 의욕이 완전히 소실되는 정신 질환입니다. 그는 몇 년간 거의 작곡을 하지 못했고, 피아노 교습과 지휘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작곡가의 우울증 1900년,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은 그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찾아간 사람은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이라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달 박사는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방법인 최면 치료(Hypnotherapy)를 사용했습니다. 최면 치료란 의식 수준을 조절해 무의식 속 부정적 신념을 재구성하고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심리 치료 ...

말러의 리허설 방식, 예술가의 기준, 엄격함, 음악적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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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휘자가 얼마나 세세한 부분까지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늘 논란거리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몇 달간 같은 곡을 반복 연습했던 경험이 있는데, 당시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니 그 과정이 결과물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체감했습니다. 19세기 말 빈 궁정 오페라를 이끌었던 구스타프 말러는 이런 집요한 완벽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지휘 방식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말러가 보여준 완벽주의적 리허설 방식 말러는 리허설에서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끊임없이 반복 연습을 요구했고, 아주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함부르크 오페라 시절 그는 6년간 무려 744회의 공연을 지휘했는데, 이는 연평균 124회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모차르트부터 베르디, 바그너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면서도 매 공연마다 최고 수준을 유지하려 했던 그의 집념은 당시 음악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였습니다. 이런 방식은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1892년 런던 공연에서 말러가 지휘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작곡가 레이프 본 윌리엄스는 이틀 밤을 잠 못 이룰 정도로 감동받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출처: Classic FM ). 철저한 준비와 반복 연습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저 역시 공연 전 리허설을 반복하며 느꼈던 건, 처음엔 기계적으로 느껴지던 동작들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몸에 배면서 무대 위에서 더 자유로워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말러의 이런 태도는 '독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한 악단원은 그의 지휘 방식에 분노해 결투를 신청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집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중과 비평가들은 그의 공연에 열광했고, 차이콥스키는 말러의 지휘를 보고 "놀라울 정도"라며 "그는 분명 천재"라고 평가했습니다. 완벽을 향한 집요함이 때로는...

드뷔시 음악세계 (인상주의, 화성파괴, 자연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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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태어나 5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 반세기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20세기 음악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습니다. 전통 화성 규칙을 무시하고 평행 5도와 8도를 과감하게 사용했으며, 전음계(Whole Tone Scale)라는 독특한 음계로 꿈결 같은 음향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 위클리 리사이틀에서 처음 그의 월광을 들었는데, 입시 준비하며 접했던 딱딱하고 규칙적인 음악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황홀할 정도로 몽환적이고 자유로운 그 음악에 단번에 빠져버렸습니다. 인상주의라는 오해와 드뷔시의 실제 정체성 드뷔시 하면 흔히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용어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원래 미술 용어인데, 비평가들이 드뷔시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붙인 편의적 분류에 불과했습니다. 드뷔시는 자신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멍청이'로 여겼고, 스스로를 단지 '프랑스 음악가'라고 불렀습니다( 출처: Music Theory Academy ). 그가 정말 공감했던 예술 사조는 상징주의(Symbolism)였습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주창한 상징주의는 단어의 의미보다 소리 자체를 중시하는 흐름이었습니다. 드뷔시는 이를 음악에 적용해 화성 규칙과 성부 진행(Voice Leading) 원칙을 무시하고 순수한 음향 효과만을 추구했습니다. 성부 진행이란 여러 성부가 동시에 움직일 때 각 성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작곡 기법인데, 드뷔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평행 화음만 쌓아 올렸습니다. 당시 파리 음악원 교수들은 이런 그의 스타일을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으며 절망적으로 무관심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도 대학 4년 내내 규칙 잘 지켜진 화성학을 공부했기에 드뷔시의 음악은 제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모양새가 있었고, 당시 음악적 기준...

라벨의 완벽한 음악세계, 오케스트레이션, 단순함의 역설, 의도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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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의 음악을 처음 제대로 의식하며 들었던 건 대학 시절 오케스트레이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라벨의 작품을 예로 들며 설명해 주셨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볼레로였습니다. 같은 리듬이 계속 반복되고 멜로디도 크게 변하지 않는데 곡이 점점 커지며 긴장감이 쌓여 가더군요. 음악적으로 보면 굉장히 단순한 구조인데 이상하게도 계속 귀를 붙잡아 두는 힘이 있었습니다. 완벽주의자 라벨의 음악 세계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1875년 프랑스 남부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2살에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신동으로 불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타고난 귀를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죠. 1889년 파리 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에 입학한 라벨은 학교 생활에 그리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음악원이란 프랑스의 국립 음악 교육 기관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라벨은 엄격한 학업 환경보다는 자신만의 속도로 배우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의 음악적 사고와 표현은 점점 현대적으로 변해갔고 이는 극도로 보수적인 교수진과 충돌했습니다. 결국 그는 1895년 퇴학당했고 1897년 다시 입학했지만 2000년에 또다시 퇴학당했습니다. 라벨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흔히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Impressionism) 음악가로 분류되는데, 인상주의란 명확한 형식보다는 분위기와 색채를 중시하는 음악 경향을 뜻합니다. 드뷔시는 이 용어를 자신의 음악에 적용하는 것을 싫어했고 라벨 역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곡을 공부하며 항상 화성 진행이나 형식 구조를 먼저 고민하던 저에게 라벨의 음악은 조금 다른 방향처럼 느껴졌습니다. 라벨은 느린 작업 속도로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엄격한 자기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머릿속에서 곡 전체를 완성한 뒤 세세한 부분까지 다듬고 나서야 악보에 한 번에 옮겨 적었다고 합니다. 이런 ...

차이콥스키의 후원자, 작품 수정, 예술가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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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술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할까 하는 의문입니다. 차이콥스키의 일생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곡가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저 역시 한때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나데즈다 폰 메크라는 후원자 차이콥스키에게는 다행히 나데즈다 폰 메크(Nadezhda von Meck)라는 후원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유한 미망인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차이콥스키를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며 13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출처: Biography.com ). 심지어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고 합니다. 이런 관계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후원자와 예술가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지키면서도 음악적 교감을 나눴다는 점입니다. 후원(patronage)이란 예술가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귀족이나 부유층의 후원에 의존해 창작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차이콥스키 역시 나데즈다의 후원 덕분에 여행하고 투어를 다니며 오로지 작곡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예술가에게 경제적 안정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1890년 나데즈다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 지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두 사람의 서신도 끊겼습니다. 차이콥스키는 돈을 잃은 것보다 그녀와의 우정을 잃은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술가에게 후원자는 단순히 돈을 대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바그너의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 바이로이트 축제, 코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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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음악을 전공했지만 생계 문제 때문에 결국 작곡을 포기했습니다. 교수님 연구를 돕거나 출판사 음악교과서 작업을 하며 버텼지만, 그마저도 안정적인 수입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라는 작곡가는 제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천재적인 음악성은 인정받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빚더미 인생, 불륜 스캔들까지 겹치며 유럽 전역을 도망 다녔던 인물입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도망친 빚더미 인생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티푸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시인인 루트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했습니다. 바그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연극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경제적으로는 늘 불안정했습니다. 20대 초반 뷔르츠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에서 합창단 지휘자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바그너의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법원 소환장이 문에 붙어 있어서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을 피해 다니는 삶이 일상이었던 겁니다. 1839년에는 리가에서 쌓인 빚 때문에 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아내 미나(Minna)와 함께 배를 타고 파리로 향했는데, 이 과정에서 겪은 폭풍우 경험이 나중에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바그너는 경제적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고, 결국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리엔치(Rienzi)' 초연으로 첫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품 속에 남겨진 불륜 스캔들 바그너는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저는 음악가로서 그의 예술성은 존경하지만, 개인적인 삶만큼은 절대 닮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후원자의 아내와...

브람스의 완벽주의, 교향곡 1번, 인간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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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을 하다 보면 첫 모티브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없이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2~3마디의 짧은 악구라고 해서 쉬울 거라 생각하지만, 곡 전체의 출발점이 되는 만큼 부담감이 상당합니다. 저도 대학 시절 오선지 위에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브람스는 이런 완벽주의 성향이 훨씬 더 극단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악보를 그냥 태워버리고, 교향곡 1번을 완성하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렸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창작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완벽주의 성향과 창작 태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베토벤, 바그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창작 과정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극도로 신중하고 느렸습니다. 브람스는 대위법(Counterpoint)이라는 기법에 능숙했는데, 이는 여러 개의 선율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도 화성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작곡하는 고난도 기술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의 멜로디만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엮어야 하므로, 작곡 난이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요하네스 브람스 : 젊은 시절의 브람스, 수더분해 보이는 수염긴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꼬장꼬장한 젊은 날의 브람스 초상화를 가져와 봤다.. 저도 작곡을 할 때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다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님께서 "좋은 작품은 한 곡에 매달려 나오는 게 아니라 다작을 하며 경험을 쌓아야 그중에서 명곡이 탄생한다"고 조언하셨지만, 저는 여전히 마음에 드는 모티브 하나가 나올 때까지 오선지를 붙들고 있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브람스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초고나 스케치 대부분을 직접 없애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악보는 아예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창작 속도를 극도로 느...

리스트의 삶 (신동의 좌절, 재기의 연습, 스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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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리스트를 그저 화려한 비르투오소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쩌면 제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동이었지만 한때는 "별거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독일 공연에서는 처참하게 실패했으며, 심지어 조롱까지 당했던 사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결국 19세기 최고의 슈퍼스타가 된 리스트의 이야기는, 늦게 시작하고 실패를 겪은 저 같은 사람에게도 묘한 위로가 됩니다. 신동의 좌절 리스트는 1811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라이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음악가였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섬기며 하이든과도 친분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출처: Britannica ). 어린 리스트는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9살 때 이미 귀족들 앞에서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감명받은 후원자들이 6년간의 학비를 대주겠다고 나섰고, 리스트는 빈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빈에서 그는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리스트 역시 11살 때 베토벤 앞에서 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리스트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체르니는 처음 리스트를 만났을 때 "재능은 있지만 운지법도 모르고 연주 스타일이 너무 혼란스럽다"고 평가했습니다. 신동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리스트는 기초가 부족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12살이 된 리스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매니저 역할을 하며 영국과 파리를 오가며 투어를 조직했고, 리스트는 '리틀 리스트' 또는 '마스터 리스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공연을 다녔습니다. 14살에는 오페라까지 작곡했지만, 초연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는 점차 신동이라는 타이틀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오히려 종교...

쇼팽이 사랑한 무대 (살롱, 손가락 길이, 생애와 음악유산, 연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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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쇼팽을 연주할 때마다 손가락부터 쳐다봅니다. 화음이 안 닿으면 연습 전에 손을 잡아당기고, 스트레칭을 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봐도 결국 운지가 안 맞는 순간이 옵니다. 그럴 때면 '쇼팽은 도대체 손가락이 얼마나 길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하지만 쇼팽을 알아갈수록 그의 음악이 단순히 신체 조건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쇼팽이 왜 큰 무대보다 작은 살롱을 택했는지, 그리고 제가 쇼팽 연주를 하며 겪었던 좌절과 깨달음을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살롱, 쇼팽이 선택한 무대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은 18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며 단 30회의 공개 연주만 했습니다. 당시 리스트(Franz Liszt)나 슈만(Robert Schumann)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대형 홀에서 화려한 연주회를 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습니다. 쇼팽은 살롱(salon)이라 불리는 귀족이나 부유층의 거실 같은 소규모 공간에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여기서 살롱이란 18~19세기 유럽 상류층이 예술가와 지식인을 초대해 음악, 문학, 철학을 나누던 사교 공간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요즘으로 치면 프라이빗 하우스 콘서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쇼팽이 살롱을 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그는 수천 명 앞에서 화려하게 연주하는 것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청중의 숨소리를 느끼며 음악을 나누는 것을 원했습니다. 실제로 쇼팽의 연주는 섬세한 뉘앙스와 페달 조절, 미세한 다이내믹 변화로 유명했는데, 이런 표현은 큰 공연장에서는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습니다( 출처: Classical Music Association ). 저 역시 졸업 연주 때 소극장 무대에 섰던 경험이 있습니다. 객석 끝에 앉은 사람 얼굴까지 다 보일 정도의 거리였고, 제가 직접 작곡한 오케스트라 곡을 초연하며 곡의 배경과 서사를 설명했습니다. 그날 연주가 끝난 뒤 한 관객이 다가와 "이래서 작곡가가 필요하군요"라고...

클레멘티 (건반 사랑, 모차르트 대결, 사업가, 소나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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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소나티네 악보를 펼쳐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 예쁜 멜로디의 대부분이 무지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라는 작곡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도 처음엔 그저 연습곡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 사람의 이력을 알고 나니 단순히 작곡가로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더군요. 피아노 제작자이자 출판업자, 사업가까지 겸했던 클레멘티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피아노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건반을 사랑한, 클레멘티   이탈리아 로마 클레멘티는 1752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년 후였죠. 그의 아버지 니콜로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던 친척에게 건반 레슨을 부탁했습니다. 7세부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한 클레멘티는 11세에 이미 대위법(counterpoint)을 배우고 있었는데, 대위법이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는 바로크 시대의 핵심 작곡 기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의 멜로디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멜로디가 서로 얽히면서 조화를 이루는 복잡한 양식이죠. 13세에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였으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14세에는 로마의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그의 인생을 바꿀 만남이 찾아옵니다. 1766년 영국의 부유한 귀족 피터 베크포드 경이 로마를 여행하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감탄했고, 그의 아버지에게 제안을 합니다. "아들을 제 영지로 데려가서 음악적 재능을 키워주겠습니다. 21세까지 분기마다 교육비를 지원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클레멘티는 영국 블랜드포드 포럼 북쪽의 베크포드 저택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저택에서의 7년간 클레멘티는 하루 8시간씩 하프시코드 앞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바흐,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 헨델, 스카를라티 같은 바로크 거장들의 작품...

글루크 음악 철학 (오페라 개혁, 드라마 중심, 절제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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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리를 더 크게 내고 표정을 과하게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게 더 잘 전달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한 관객이 제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조용히 부르던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제가 힘을 뺀 부분,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순간이 가장 깊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프 글루크(Christoph Gluck, 1714-1787)의 음악을 들을 때면 바로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절제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오페라 개혁, 화려함을 걷어낸 용기 글루크가 활동하던 18세기 중반, 오페라는 이미 160년 넘게 굳어진 형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바로크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 불리는 이 장르는 화려한 기교와 긴 장식음,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 형식이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다 카포 아리아란 A-B-A 구조로 돌아가며, 가수가 처음 부분을 반복할 때 즉흥적으로 장식음을 넣어 기교를 과시하는 형식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성악가의 자랑 무대였던 셈입니다. 글루크는 1760년대 초반, 이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오페라가 이야기의 흐름보다 가수의 기교에 집중하면서 본질을 잃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762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를 발표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아리아의 경계를 흐리고, 음절 중심의 단순한 선율을 사용하며, 오케스트라가 드라마를 뒷받침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출처: Britannica ). 레치타티보란 말하듯 노래하는 부분을 말하며, 바로크 시대엔 건반 반주만으로 처리되던 것이 글루크에 의해 오케스트라 반주로 바뀌면서 극적 긴장감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사실 뭔가를 더하는 건 비교적 쉽습니다.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 그런데...

모차르트는 정말 천재였을까 (신동 신화, 작곡 과정, 영화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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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하면 머릿속에 완성된 곡을 그대로 악보에 옮겨 적는 천재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저도 중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모차르트를 처음 접하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세상에 저런 천재가 있을 수 있나"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최근 자료들을 살펴보니, 우리가 알던 모차르트의 모습 중 상당 부분이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신동(神童)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그의 진짜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신동 신화: 3살에 피아노, 4살에 작곡?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궁정 작곡가였고,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일곱 자녀 중 막내였던 모차르트를 '볼페를(Wolferl)'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레오폴트는 볼페를이 3살 때 피아노를 치고, 4살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5살 때 첫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당시 레오폴트는 아들의 재능을 유럽 각국 궁정에 소개하며 돈을 벌고자 했던 일종의 매니저였습니다. 즉, 신동 이미지를 과장할 동기가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1762년 비엔나 황실을 방문했을 때, 6살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갈채를 받았지만, 이는 철저히 아버지의 기획 아래 이루어진 공연이었습니다( 출처: Biography.com ). 제가 직접 피아노를 배워본 경험으로는, '작은별 변주곡' 같은 초급 곡도 처음 배울 때는 손가락 위치 잡는 것만 해도 한참 걸렸습니다. 그런데 4살짜리가 협주곡을 작곡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레오폴트가 손을 대거나 구조를 잡아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작곡 과정: 머릿속 완성곡을 옮겨 적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

베토벤 일대기 (본, 하이든, 청각장애,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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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간에 졸던 친구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곡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그게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었습니다. 그 임팩트 있는 시작부터 압도적인 하이라이트까지, 교실 전체가 깨어나는 순간이었죠. 베토벤은 우리나라에서 '하희돈의 제자'로도 불렸던 인물인데요. 하희돈이 누구냐고요? 바로 하이든을 한자로 음역한 이름입니다. 해방 직후까지 이렇게 불렸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본(Bonn)에서 시작된 음악 인생, 그리고 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770년 독일 본에서 평범한 서민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고귀한 혈통도 아니었고, 그저 음악을 업으로 삼는 평범한 집안이었죠. 베토벤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평생 이 동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고 합니다. 베토벤의 첫 음악 선생님은 아버지 요한(Johann)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이 베토벤을 너무 가혹하게 가르쳐서 항상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확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자신의 천재 자녀들, 난네를(Nannerl)과 볼프강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 투어를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심지어 베토벤이 7살일 때 첫 공연 포스터에 나이를 6살로 속여 적기까지 했죠. 7살이면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16살 무렵 베토벤은 비엔나로 가서 모차르트를 만나려 했습니다. 실제로 만났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릅니다. 역사는 이런 중요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비엔나에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는 더욱 무능해졌습니다. 베토벤은 10대 후반을 동생들을 먹여 살리며 보냈습니다. 그는 정말 책임감 강한 형이었던 거죠. 하이든과의 만남, 비엔나 정착기 1790년...

헨리 퍼셀 (디도의 탄식, 바로크 음악, 영국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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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합창단 연습 중에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복도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음악이 바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659년 런던에서 태어나 36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는 영국 바로크 음악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디도의 탄식 헨리 퍼셀의 《Dido and Aeneas》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왜 사람들이 이 작곡가를 300년 넘게 기억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디도의 탄식(Dido's Lament)'이라는 아리아(aria)는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리아란 오페라나 칸타타에서 독창자가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를 뜻하는데, 이 곡은 화려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청자의 마음 깊숙이 파고듭니다. 1689년 첼시의 한 여학교를 위해 작곡된 이 작품은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비극적 사랑을 다룹니다( 출처: Britannica ). 퍼셀은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아리아를 절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레치타티보란 오페라에서 대사를 전달하듯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부분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극적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잃지 않았습니다. 제가 합창 연습 중 갑자기 눈물을 쏟았던 것처럼, 퍼셀의 음악은 준비되지 않은 감정까지 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발달한 오페라 전통이 없었습니다. 퍼셀은 이 공백을 메우려 노력했고, 영국만의 정서를 음악에 담아냈습니다. 그의 화성(harmony) 처리 방식은 여러 음이 동시에 울려 만들어내는 소리의 조화를 극대화했고, 대위법(counterpoint)을 통해 서로 다른 선율이 독립적으로 진행하면서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놀라운 표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퍼셀 음악의 특징입니다. ...